▲ 역전 근린공원에 설치된 안중근 동상-가슴에서 총을 꺼내는 모습이다
안중근의사기념관 관계자가 의정부역 근린공원에 설치된 안중근 동상은 “고증이 안 된 ‘작가의 예술적 상상력’에 의한 창작품”이라고 평했다.

이곳에 설치된 안중근 동상은 우리가 봐온 모습과 너무나 달랐다. 동상에 표현된 용모는 의거 당시 31세의 젊은 패기와 용맹한 기상과는 달리 깡마른 체구에 나이 든 모습이다. 급기야 시민들이 의아해하기 시작했다. 또한, 동상 좌대에 표현된 몇몇 내용은 출처불명으로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안중근 동상 설치는 2015년 5월 14일 한·중 포럼에서 중국 차하얼학회(察哈尔学会) 한방명 주석, 안병용 의정부시장, 한국국제문화교류원, 신한대학 사이에 ‘안중근 의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사업 협력 양해각서’ 체결로 이루어졌다.

동상 표현 대로 안의사가 저격 당시 이등박문(伊藤博文,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뛰었을까? 이에 대한 답변으로 동상 설치를 위해 수년간 전담한 의정부시 A과장은 본지와 전화 인터뷰에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A과장는 지난 4월 동상 제작자를 만나기 위해 북경 사무실과 작업장을 오갔다.

이에 반해 안중근의사기념관 관계자는 본지와 인터뷰에서 안의사가 뛰어가면서 이등박문을 저격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닌 작가의 설정”이라면서 “안의사는 옥중에서 쓴 자서전에서 이토 저격 당시 울분을 참으며 용기 있게 뚜벅뚜벅 걸어 4발을 쐈다”고 전했다.

안중근의사기념관 이주화 학예과장은 1일 본지와 인터뷰에서 “동상은 중국 차하얼학회서 좋은 뜻으로 기증한 것으로 안다. 안의사 자료는 국내에 많다, 고증이 잘 안 됐다. 동상이 안의사와 닮지 않은 부분은 빠른 시일에 해결되지 않으리라 본다. 동상 제작 때 물어 봤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우리나라 작가라면 좀 더 심한 평을 하겠지만 중국에서 선의로 제작해 기증한 동상을 굳이 폄하하고 싶지는 않다. ‘작가의 예술적인 상상력’이라고 하면 할 말은 없다. 동상 모양을 못 바꾼다면, 의정부시가 지금이라도 작가의 상상력에 의한 창작품이라는 설명만이라도 현장에 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과장은 또 “동상 좌대에 있는 내용에 부정확한 부분들이 있다. 좌대는 의정부시가 만들었다. 빠른 시일 내 팩트에 맞게 수정해야 한다. 좌대에 안의사 부조 모습도 손가락(왼손 무명지 첫마디)에 단지가 보여야 한다. 안의사 어머니는 옥중 서신을 보내지 않았다. 좌대에 ‘사랑하는 아들 중근에게’라는 노래 가사 출처가 설명되지 않았다. 이 노래는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지으신 게 아니다. 시민들이 오해할 수 있다. 이 시는 현존하는 이은옥 시인의 현대시”라고 덧붙였다.

의정부시 A과장은 “안의사 동상 (용모가) 닮았다, 안 닮았다는 논란에는 육군사관학교, 전남 함평, 부천시에 설치된 동상 얼굴이 다 다르다. 저격 당시 안의사 얼굴을 본 사람은 없다. 지난 5월초 작가는 현장에서 설명을 곁들여 동상 방향도 설정해줬다. 급하게 총을 꺼내면서 뛰어가는 사람 얼굴이 서 있는 사람과 같을 수는 없다고 했다. 5월 초 작가가 역전 근린공원을 방문했을 때 ‘동양 평화론’을 주장한 안의사 유지에 따라 총을 꺼내며 뛰는 방향도 중국·일본·북한 쪽이 아닌 남쪽을 향했다.

안의사 동상은 애초 중국 안중근 기념관이 하얼빈시 조선민화박물관에서 시진핑 주석 지시로 하얼빈역 안에 만들었다. 올해 하얼빈역 신축 공사로 안중근기념관은 다시 조선민화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내년말 하얼빈역이 준공되면 차하얼학회에서 의정부시와 같은 모습으로 동상을 제작해 역 내부에 세울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해명했다.

▲ 정면에서 바라본 동상. 방향이 중국·일본·북한 쪽이 아닌 남쪽을 향했다
▲ 역전 근린공원에 설치된 안중근 동상 얼굴 모습
▲ 동상 왼손 무명지에 고증과 달리 단지(斷指)가 표현되지 않았다
▲ 동상이 작가의 예술적인 상상력'에 의해 사실과 달리 달려가는 모습으로 표현됐다
▲ 서울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 앞 안중근 동상 모습
▲ 안중근의사기념관 3층 전시실에 재현된 거사 당시 모습 (밀랍 인형)
▲ 뤼순 옥중에서 마지막 면회. 빌렘 신부와 정근·공근 두 아우에게 유언하는 안의사. 사진(안중근의사기념관  제공)
▲ 뤼순 감옥 안중근 모습-안의사는 이토를 저격한 후, 그 자리에서 체포돼 뤼순의 일본 감옥에 수감 중 1910년 3월 26일 사형당했다. 당시 체포된 안중근은 자신 외에 단지동맹 가담자가 11명이 더 있다는 말만 하고, 끝까지 동지들 이름을 공개하지 않았다. 단지혈맹(斷指血盟)은 조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 노령(露領) 카리에서 동지 12명이 모여 왼손 무명지를 잘라 그 피로 태극기에 ‘대한독립’ 넉 자를 쓰고 맹세했다.
▲ 안중근 의사 표준영정. 사진(안중근의사기념관 제공) ‘見利思義(견리사의) 見危搜命(견위수명)’ “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쳐라.”

아침 일찍 양복 한 벌을 갈아입은 뒤, 단총을 지니고 정거장으로 나가니 그때가 오전 7시쯤이다. 그곳에 이르니 러시아 고관들과 군인들이 많이 나와 이토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나는 찻집에 앉아 차를 마시며 기다렸다. 9시쯤 되어 도착했다. 나는 동정을 엿보며 스스로 생각하기를 “어느 시간에 저격하는 것이 좋을까?”하며 미처 결정을 내리지 못할 즈음 (중략) 울분을 참으며 용기 있게 뚜벅뚜벅 걸어 군대가 늘어서 있는 뒤편에 이르니 러시아 관리들이 호위하고 오는 조그마한 늙은이가 있었다. “저자가 필시 이토일 것이다” 생각하고 바로 단총을 뽑아 그를 향해 4발을 쏘았다. 그자가 정말 이토인지 의심이 났다. 만약 잘못 쏘았다면 낭패다. 다시 뒤쪽에 일본인 무리 가운데 가장 의젓해 보이며 앞서 가는 자를 향해 다시 3발을 이어 쏘았다. (중략) 러시아 헌병이 나를 체포하니 그때가 1909년 10월 26일 상오 9시 반쯤이었다. (안중근 의사 옥중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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