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동적 민주주의 사회에 자유의지를 가진 시민을 부정한다면, 우리는 단지 수동적인 소비자에 불과하다. 사회 구성원은 자신의 위치에서 공동체와 사회에 기여하기 위해 존재한다. 공무원의 영어식 표현은 ‘civil servant’다. 풀이하면 civil(시민의) servant(하인)이다. 풀뿌리 민주주의와 지방자치의 근간은 시민이다. 시청사의 주인은 시민이고 공무원은 시민의 공복(公僕)이다. 시청사는 시민이 자유롭게 드나들어야 할 광장이고 안방이다.

최근 시청사 출입시스템 설치를 앞두고 의정부시공무원노동조합이 “조합원 안전을 위해 출입통제시스템이 조기에 정착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노조는 1400여명 전체 직원 가운데 6급 이하 직원 800여명 의견을 대변했다. 이들은 권위주의 시대에 선배들이 겪어온 수직적 조직에 익숙치 않다. 이들 세대의 특징은 조직 내 희생보다는 개인의 의견이 우선되는 ‘진보적 자유주의-리버럴리즘(liberalism)’에 가깝다.

시 공노조는 최근 봉화군 민원인 총기 살해사건, 가평군 민원실 화재 사건, 파주시청 민원실 난동 사건 등으로 조합원 안전 대책이 필요하며, 최근 시청사 점거 농성에서 무방비로 노출된 조합원과 시민 안전을 담보할 수 없어 안전시설 설치를 요구했다. 노조가 출입통제 액션플랜을 정당화 한다는 느낌이다. 노조의 주장은 일견 ‘깨진 유리창 이론’으로 빈 건물의 깨진 유리창을 방치하면 여러 개가 연이어 파손되고 결국 방화 등 대형범죄로 이어진다는 말처럼 들린다.

공리주의자 ‘제러미 벤덤’은 “우리 사회가 최대한 개인의 자유를 허용하면서도 타인의 행복을 감소시키는 행위는 철저히 규제해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후계자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위해(危害)의 원칙’을 제시했다. 즉 “문명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그들의 의사에 반해 권력을 행사하더라도 정당하게 인정되는 유일한 목적은 그들이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지 못하게 막는 경우 뿐”이라고 했다.

밀은 더 나아가 “정부는 단지 국민 ‘자신의 이익’에 도움이 되리라는 이유로 법을 제정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어느 한 시민의 행위가 다른 시민에게 해를 끼친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없는 한 그의 행위는 허용돼야 한다. 시민의 지속적인 감시와 견제가 없으면 정부 권력은 점차 확대되고 개인의 자유는 갈수록 침해당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좋은 사회의 기초는 개성의 표현이다. 사회 내 ‘올바른 행위’나 ‘방식’을 강요하는 것은 압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공공기관 내 집단 농성 또한 시시비비를 떠나 정치적 표현이다. 이들의 농성 이면에는 시민을 대변해야 할 의회의 무능과 무관하지 않다. 밀은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 근간이라고 했다. 특히 공권력이 사회적 약자의 행위나 표현이 다소 불법적이라고 제재를 가한다면 약자일수록 ‘학습된 무기력’에 ‘순종적 시민’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장애인, 이방인(이주노동자), 노인, 여성, 실직자 등 소외계층을 생각하면 더욱 세심한 접근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개인의 자유와 국가의 통제 사이에서 올바른 균형이란 무엇일까? 밀은 이것을 ‘미래의 문제’라고 표현했다. 실제로 우리는 최근 다양한 공론장의 변화와 정치적 사변을 겪었다. ‘한나 아렌트’는 “동물은 생존 본능과 충동에 따라서 행동하지만, 인간은 뭔가 사회적으로 공인된 가치로 바꾸기 위해 희생도 서슴지 않는다”고 말했다. 철학자들은 공리주의적 사고의 결함으로 “우리가 사용가치로만 규정할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고 조언한다.

지난 10월 지역 발달장애인부모연대가 30일간 시청 점거 농성 끝에 한 말은 “우리들 눈에는 시장님이 하느님보다도 더 한 자리에 계십니다. 제발, 도와주세요!”였다. 행정 과잉의 시대, 소통 부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홍수가 나면 물은 넘쳐나지만 마실 물은 정작 부족하다'는 표현이 떠올랐다. 문제는 출입통제가 아니라 소통이다. 시 당국도 원점으로 되돌아가 소통의 자기검열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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